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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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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17일 (금) 10:29:13 심웅섭 shimws2002@hanmail.net

내 아버지는 좀 마르신 체구에 성질이 급한 편이셨다. 급한 성질에, 약한 체력으로 늦자식들을 조롱조롱 키워대며 5천 평 사과농사를 지으시는 게 당신에게는 무척 힘에 부치시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부장적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으니 여차하면 식구들에게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성질 급한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형제들이 올망졸망 모여 놀다가도 아버지가 섭아! 하고 안방에서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소리와 동작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긴장을 한다. 그 섭이가 어떤 섭인지,네 명의 섭이들로써는 참 알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지금의 상황과 느낌으로 이건 담배심부름이니 막내인 웅섭이 차례구나 판단이 서는 순간 네!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 앞에 대령하곤 했다. 만일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두 번째 "섭아"소리가 떨어질 것이고 그때까지 아무 대답을 안하는 날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막내사랑은 좀 심할 정도의 편애에 가까웠다. 쉰 하나의, 당시로서도 드물게 늦게 본 막내아들, 게다가 밥을 잘 안 먹어 키도 작고 다리가 새처럼 가느댕댕하고보니 (아버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안쓰러워서 그리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초등학교 4학년까지 집에서의 내 호칭은 "애기"였으며, 여차하면 엎자고 돌려대는 아버지의 등짝을 창피하다고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겨우 졸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밥상에서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쌀밥을 나눠먹었고 이틀에 한 번꼴로 암탉이 낳은 계란을 뜨거운 밥과 간장으로 비빈 계란밥, 당시로서는 귀하디 귀한 계란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아버지와 나 뿐이었다.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보리밭 사이로 은근히 데려가시더니 노랗게 익은 개똥 참외를 따서는 무릎에 쓱쓱 닦아 내미시는 게 아닌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참외하나를 다 깨물어 먹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셨다. 햇볕에 뜨끈해진 개똥참외는 달고도 풋풋한 맛이 났다. 그 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진 건 아마도 느릿느릿 울어대는 뻐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막내의 효도는커녕 장성한 모습도 보시지 못하고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던 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크지도 않은 555평의 독산(민둥산) 과수원과 개똥참외의 기억을 남긴 채.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5년, 그 애기 같던 막내는 한 여자의 지아비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나이도 쉰을 넘어섰다. 그 사이 나에 대한 호칭은 '애기야'에서 '아빠'로 바뀌었다.

그런 나를 두 아들딸은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이 추억할 개똥참외를 과연 나는 주기나 했을까? 혹시나 그들의 인생에 사사건건 훈수를 들이대는 잔소리꾼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열 마디의 잔소리보다 한 개의 개똥참외가 훨씬 더 오랫동안 그들의 인생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라는 걸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제 며칠 후면 아버지 제삿날이다. 이번 제사에는 개똥참외는 아니더라도 노랗게 익은 탐스러운 참외나마 풍성하게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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