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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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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04일 (수) 12:04:29 심웅섭 shimws2002@hanmail.net
얼마 전 딸내미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문제의 발단은 딸의 자취방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면서 시작됐다. 늘 그렇듯 좌식 변기에 시원스럽게 서서 쏴를 하는 나에게 딸이 날 선 멘트를 날린다.

“아빠, 그렇게 누면 어떡해, 앉아서 눠야지!”

“응, 뭐? 앉아서 누다니? 난 원래 서서 누는데? 그리고 아빠는 실력이 좋아서 안 튀고
깔끔하게 눈다고“

“아빠, 앉아서 누는 사람들도 배려해야지, 남자들이 그렇게 누면 이리저리 튈 거고 거기에 앉아 누는 사람은 얼마나 찝찝하겠어? 아빠 시골로 이사 가더니 요즘 좀 변했어!”
   
  ▲ 눌곡리 주민들이 심웅섭PD가 마련한 작은 음악회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출처: 보은사람들  
 

내가 서서 오줌을 눈 게 어제 오늘도 아닌데, 갑자기 태클을 걸어오는 딸내미가 은근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딸과 나의 인생행로가 달라서 생긴 일종의 문화충돌(?)이 아닌가 싶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 나는 시골에 자리 잡았다. 그 전에도 아파트를 피해 도시 주변의 단독주택을 전전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멧돼지 내려오고 고라니 깩깩거리는 산골짝으로 옮긴 것이다. 남들은 점점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데 나이 들수록 산골로만 들어가는 아빠가, 건듯하면 작업복에 시골사람들과 막걸리나 마시고 흙과 땀에 절어 밭일과 목공일을 해 대는 아빠가, 딸 입장에선 곱게 느껴질 리 없다. 딸은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문명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가고 있는데 아빠는 점점 야만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으니 어찌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나는 1960년에 과수원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그 시대의 평균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자연과 전원 속에서 전통적인 삶을 살면서 서구식 합리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까지 16년, 아니 그 후 직장생활하고 나이 40이 되기까지 내 머릿속에는 농사짓는 일이나 밥 짓는 일은 물론이고 어쨌든 몸을 놀려 무얼 만들고 땀 흘리는 일은 약간 저급한 인생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 시골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렁이 들이고 전통적인 삶은 아직 고쳐지지 못한 야만이었다. 과학과 문명은 아주 최선의 방향으로, 아니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국가나 학교들이 제시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향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되던 해부터 그런 나의 생각들이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진리들이 있다는 것도, 자본주의가 인간이 만든 최선의, 혹은 최종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도 슬금슬금 알아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들이 주입한 가치관, 문명과 과학은 좋은 것이고 전통과 본능은 저급한 것이라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일 년 전에 시작한 집짓기와 목공일은 나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주었다.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있다니, 이건 뭐지? 어쩜 이건 수컷의 집짓기 본능이겠구나.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집짓기뿐이 아니다. 흙을 파고 풀을 베고 돌을 나르고....... 즐겁기 그지없는 이런 짓들이 모두 수컷들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옳다구나, 여기에 뭔가가 있겠구나. 어쩜 과학과 교육이 주지 못했던 엄청난 보물이 나의 본능 속에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아니 억눌려서 발현되지 못했던 나의 수컷 본능을 하나씩 일깨워보는 일이리라. 더군다나 이름 가운데에 수컷 웅(雄)자가 턱 박혀있음에야.

딸아, 아빠의 이 수컷여정을 이해해주렴. 이것이 꼭 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만 아빠는 54년의 인생 경험 속에서 지금 현재 이런 판단을 내린 거란다. 너도 아빠 나이가 되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지 않겠니? 아빠도 너의 집에서는 가능하면 오줌을 참아 볼 테니까 제발 아빠가 변기에 걸터앉길 기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네가 이제 막 세상과 문명을 향해 첫 발을 내 디디듯, 사실은 아빠도 이제 막 수컷본능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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