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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빨간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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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25일 (목) 08:03:39 김승효 backsteam@nate.com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이 일터와 학교로 가고나면 나도 출근을 위해 서둘러 준비를 한다. 모두가 나간 후, 널려있는 이불과 수건과 잠옷들을 정리하고 어수선한 아침밥상을 치우고 나면 화장대 앞에 앉는다. 스킨, 로션을 바르고 아이크림, 영양크림을 바르고 썬크림을 바르면 내 화장은 끝이 난다. 그런데 아주 가끔 빨간립스틱을 바를 때가 있다.

8월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추석명절을 지내야 하는 고단함이 있었고, 작은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일이 있었고, 생각지 않게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책임을 맡은 일로 사람들과 불편한 속내를 주고받는 일이 있었고, 내 스무 살 청년기에 멘토였던 선배에게 갑작스레 날아든 비보를 들어야 했다. 이렇듯 겹겹이 다가오는 좋지 않은 일들로 매일매일 마음의 전쟁을 치뤄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쉬지 않고 돌아갔고 일상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화장대에 앉아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어서 빨리 8월이 지나가기를...’시간만이라도 빨리 가서 설상가상의 8월이 지나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다란 기대와 간절함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난, 새로운 기운이 다가오도록 주문을 걸 듯이 빨간립스틱을 발랐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빨간립스틱을 바르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하루일과가 마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자동차에 시동이 부드럽게 걸릴 것이고, 신호도 막힘없이 쭉 이어져 사무실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이고, 사무실에 일들이 아귀를 맞춘 듯이 딱딱 맞아떨어지게 처리될 것이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맛있는 점심을 먹을 것이고, 느닷없이 좋은 소식이 내게 전해질 것이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 조잘대는 작은아들이 웃으면 반겨줄 것이고, 옆에 서있는 듬직한 큰아들은 ‘잘 다녀오셨어요!’인사를 할 것이고, 저녁밥상을 차리기 위해서 하는 요리마다 유난히 맛있게 될 것이고, 늦게 퇴근한다던 남편이 예고없이 일찍 들어와서 오랜만에 온가족이 저녁밥을 먹을 것이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삼부자를 나란히 거실에 눕게 하고서 맛사지팩을 붙여줄 것이다.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좋아진 기분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으로 그렸던 하루가-전적으로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펼쳐지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침울한 마음에서 빠져나오는 나만의 방법치고는 나름 귀엽고 간단하고 가장 효과적이지 않은가!!

오늘은 9월 1일, 남편의 생일이다. 잘 불린 미역에 홍합살을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 미역국과 하얀 쌀밥과 작은아들이 고른 고구마케잌으로 생일상을 차렸다.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아들들은 아빠에게 진한 포옹으로 축하의 말을 몸으로 대신했다. 특별한 날이지만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으니 남편은 출근을 서둘렀고 아이들은 학교 갈 차비를 했다. 모두가 나간 후, 집안을 정리하고 나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스킨, 로션을 바르고 아이크림, 영양크림을 바르고 썬크림을 바르고 옅은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내 화장은 끝났다. 오늘 난, 빨간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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