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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는다, 오래된 미래는 무엇인가
[이은규의 눈]누가 ‘허슬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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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1일 (화) 07:15:37 이은규 guevara21c@hanmail.net

11월은 암울하다. 11월은 충분히 을씨년스럽다, 그리고 11월은 공포다. 지금 세상에 11월은 그악스럽기 그지없다. 세상이? 아니다. 사람에 11월로 정정하는 것이 맞겠다. 사람이 사는 11월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누구의 탓인가?  코 앞에 와 있는 12월은 조금 다를까?

“누가 ‘허슬러’가 아닌가?” 시인 이문재의 칼럼 제목이다. 시인 이문재는 모리스 버먼의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 에 나오는 대목을 소개하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 버먼은 미국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미국인들이 타자(다름)에 대한 공감능력, 사익보다 공공선을 우선하는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미국과 다른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에게 버먼이 강조한 ‘과거의 미래’, 즉 ‘오래된 미래’는 무엇이었던가.”여러분에게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경향신문>누가 ‘허슬러’가 아닌가 / 이문재 시인

시민대학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쫓기고 불안해한다.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을 추구하느라 괴로워한다. 이들의 목표는 막연한 물질적 성공이고,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수익을 얻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도덕적 기초가 없는 세계’를 향해 표류하고 있다고 쓴 작가도 있다.

어떤 여행자는 이 나라 사람들이 길거리든, 도로 위에서든, 노천이든 극장이든, 커피숍이든 아니면 가정집이든 어디서든 대화할 때 ‘돈’이라는 단어가 빠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법학자는 모두가 최상층이 되고자 하는 병적인 조바심으로 인해 ‘무서울 정도로 정신착란이 빈발’한다고 언급했다. 한 출판인은 이 나라 젊은이들이 ‘햇빛을 빼앗겼다’라고 표현했다.

어느 나라일까. 나이가 지긋하신 시민대학 수강생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리나라’라고 답했다. 지난 수요일 오후, 교양과목을 듣는 대학생들에게도 위와 같은 내용을 들려주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도 쉽게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그렇다면 위의 상황이 어느 시기에 발생했다고 보느냐고 되물었다. 대부분 2015년 현재라고 답했다. 중년층이나 이십대 초반 학생 모두 답을 맞히지 못했다. 위에 소개한 나라는 미국이고, 위의 암울한 시기는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인 1830년대다.

최근 번역된 모리스 버먼의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김태언·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국사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면, 보통의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일반 상식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버먼에 따르면, 미국의 지식인조차도 미국인의 정체성, 미국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눈으로 현실을 보면서도 그 현실을 부정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문화사가이자 사회비평가인 버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일반 상식을 여지없이 뒤집는다. 그는 건국 이후 미국을 이끌어온 지배 이념은 청교도 정신이나 공화주의가 아니라 허슬링(hustling)이라고 말한다. 허슬(hustle)이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허슬러(hustler)는 한마디로 탐욕스러운 경제적 동물이다. 버먼은 미국인은 허슬러이고, 그들의 삶의 방식은 허슬링 라이프라고 단언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구성하는 야심, 혁신, 근면, 조직, ‘할 수 있다’ 정신이 다 허슬링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불편한 진실’일 때가 많다는 데 동의한다면, 버먼의 논지는 진실로 읽힌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목록은 더 있다. 남북전쟁이 남부의 노예제를 해방하기 위해 발발했다는 우리의 상식도 버먼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자본주의였다. 산업화로 치닫던 북부가 농본사회에 머물러 있던 남부를 복속시키기 위해 노예제를 빌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허슬링 라이프는 기술 숭배와 만나면서 가속도를 낸다. 버먼은 미국인들이 기술을 기독교 내세관과 동일시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인들은 일찍이 기술의 진보는 신성한 계시이며 기술이 국가의 진보와 직결된다고 확신해왔다는 것이다.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베이비 붐 세대,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성거리는 대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 19세기 이후 미국이 달려간 길을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의 가까운 미래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두 세기 전 미국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경제적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경제적 동물이 되고자 발버둥 친다. ‘나는 허슬러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버먼은 책에서 자기 의견을 지지하는 미국인이 20만명이 채 안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버먼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특이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카터는 미국 역사상 매우 드물게도 ‘내적 풍요와 외적 검약’을 외쳤다. 카터의 ‘비현실적 비전’은 레이건에 의해 사라졌다. 미국은 ‘외적 풍요와 내적 공허’로 즉시 복귀했다. 버먼은 미국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미국인들이 타자(다름)에 대한 공감능력, 사익보다 공공선을 우선하는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미국과 다른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에게 버먼이 강조한 ‘과거의 미래’, 즉 ‘오래된 미래’는 무엇이었던가.

(기사바로가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272118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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