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과 민주화

하늘소리
2011-03-10
조회수 7202
늙는다는 것과 민주화

머리를 감을 때 샴푸를 사용하시는가? 아니면 비누나 다른 어떤 것을 쓰시는지? 나는 본래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다 빨래비누가 주변에서 사라지면서 세수비누를 쓰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머리가 답답해서 샴푸를 사용해 보았다. 머리가 없는 것 같다. 내친 김에 미장원에서 머리 마사지까지 했다. 다시 비누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쌀겨를 이용해 만든 와이 생협의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니 냄새도 좋고 환경에 조금은 해가 덜 가니 미안함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와이회관까지 샴푸를 사러가는 게 잘 안 된다. 결국 시장표 샴푸와 린스를 쓰게 되었다. 머리에 물을 뿌리고 샴푸를 바르기 위해 샴푸통을 찾으니 새로 사온 샴푸와 린스가 나란히 놓여 있다. 얼굴에 물이 줄줄 흐르는데 깨알 같은 글씨 사이로 어느 것이 샴푸인지 린스인지 읽어보려고 한참을 애먹었다. 한글도 아니고 이리저리 현란하게 꼬부려 놓은 영문 알파벳은 읽어내기가 무척 힘든다.

얼마 전 아이들과 2박3일로 주남저수지와 우포늪을 다녀 온 일이 있다. 첫날은 아이들과 찜질방에서 잤으나 둘째 날은 찜질방과 모텔이 함께 있는 시골의 찜질방으로 가서 아이들은 찜질방으로 보내고 모텔방으로 갔다. 7-80년대 여관방을 연상하면 분위기가 비슷하다. 다만 인터넷이 잘 돌아가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는 게 신기하다. 욕실에서 샴푸를 하려고 눌러보니 잘 안 나온다. 거품도 잘 안 난다. 귀찮아서 린스는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도 그랬다. 머리는 맨질맨질한데 개운치가 않다. 생태관으로 가는 차안에서 아내가 그런다. 모텔과 찜질방은 시골노인들이 일하셔서 샴푸와 린스를 리필하는데 바꾸어 넣었단다. 그럼 나는 두 번 다 린스만 한 셈이다.

아이들이 아빠가 멀리 일하러 가셔서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우리 집으로 와서 며칠만 학교를 다니겠단다. 아내는 아침에 서둘러 일하는 게 서툴다. 게다가 계집아이를 키워본 일이 없어 머리 묶어주는데도 한 세월이 걸린다. 내가 밤에 밥을 안쳐서 예약을 눌러 놓고, 계란말이는 맛이 떨어져도 큼직하게 말아서 미리 식탁에 올려놓고, 김치는 살짝 씻어서 볶아놓았다. 아침에는 국만 끓이면 된다. 아이들 아빠가 계란을 두 판이나 사 보냈으니 계란 요리로 가자. 계란찜을 국 대신 하자. 대접에 계란을 빠른 속도로 깨 넣는데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알맹이는 쓰레기 봉지로 떨어지고 껍질은 대접에 떨어진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다시 하자.

아내가 열쇠를 어디 두고 내 열쇠를 가지고 다닌다. 강습일지를 어디에 놓았는지 찾지를 못해 한 나절을 그냥 허비했다. 다른 서류를 찾다가 강습일지를 찾았다. 오른 손 옆 책꽂이에 가지런히 잘도 꽂혀 있다. 그 동안 밀린 일지를 쓰면서 생각해 본다. 서류를 복잡하게 만들고, 깨알같이 약관을 기재하고, 글씨를 멋들어지게 디자인해서 읽기도 어렵게 쓰고, 건물의 외관을 장중하게 만든다고 창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게 건물을 짓는 것들은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선거나 각종 제도가 민주화되었다고 사회가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문화가 형성될 때 비로소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커다란 한글로 샴푸통에 “샴푸”라고 적히는 날까지 투쟁구호를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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