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와 장악원
요사이 텔레비전 사극 '동이'를 보고 있습니다. '허준', '대장금'으로 유명한 이병훈 피디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허준'에서 우리의학을, '대장금'에서 우리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이'는 우리음악을 알리려고 만들었다기에 애정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 회부터 우리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온통 초보자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원래는 야심차게 국립국악원 연주단원들을 초대해서 촬영을 했는데 사전에 알리지도 않은 무리한 상황들을 아무런 해명도 없이 강행하기에 단원들이 태업(怠業)을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뒤로 전문가는 포기하고 국악전공 학생들을 불러 촬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출자께서 우리음악 하는 분들에 대한 사전 이해가 너무 없었나봅니다. 돈보다는 우리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존심을 먹고 사는 분들입니다.
이제 '동이'에서는 우리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종종 나오던 우리 동이의 그 아름다운 '해금'연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앙꼬? 없는 찐빵'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그나마 '동이'는 장희빈이 벌이는 궁중 권력 암투의 숨은 비리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재미로 계속 인기상승 중입니다. 궁중 감찰부의 궁녀가 되어 펼치는 동이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도 '동이'에 제대로 된 우리음악이 다시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직접 소리북을 치시며 우리 가락으로 찬송하시는 한 목사님이 보내신 메일을 제가 임의로 편집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뉴스가 교묘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통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지만 뒤늦게 저도 동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악기는 화면에 보이는데 연주는 들을 수 없고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아무래도 우리악기 소리가 아닌 중국의 얼후 소리로 들립니다.
오늘은 조선의 음악교육과 연주자를 관장하던 관청인 장악원과 맹인 연주자, 그리고 여성 연주자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젊은 단원들에게 떠밀려 예술단의 단장을 맡고 있지만 국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관심 있게 읽은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그간 만나 본 명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할 뿐입니다. 얘기는 얘기일 뿐 오해는 없으시길.....
장악원은 조선시대 음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각종 제사와 의례, 각종 행사의 음악과 음악교육, 악공(樂工)·악생(樂生)의 관리를 담당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처럼 향악과 당악은 관습도감과 전악서가 담당했다. 아악은 봉상시와 아악서가 담당했다. 이중 관습도감과 봉상시가 각각 상급기관의 역할을 하고 전악서와 아악서는 악공·가무를 담당한 재랑(齋郞)·무공들의 관청 역할을 했다. 조선의 악제는 세종대를 정점으로 대폭 정비되었다. 세조는 그 뒤를 이어 음악담당 관청의 통폐합을 단행했다. 악학과 관습도감을 합하여 악학도감으로 하고 봉상시의 제조와 판사를 도제조와 도감사(都監使)로 임명하여 모든 제악사무(祭樂事務)를 총괄하게 했다. 또 아악서와 전악서는 장악서로 통합하여 악공·악생·가무를 담당한 재랑·무공을 모두 이곳에 입속시켰다. 이로써 상·하급 기관이 각각 하나로 통합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상·하의 2기구를 다시 통합 장악서로 만들었다. 이후 성종 즉위를 전후한 시점에서 장악서를 3품아문으로 승격시키고 장악원으로 개칭했다. 실제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은 악공과 악생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악공은 천인출신들로 우방에 속했는데, 정원은 572명이었다. 악생은 양인출신으로 좌방에 속했으며 정원은 399명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의 장례원(掌禮院)으로 이속되면서 소멸했다. 장악원 건물은 처음에는 서부 여경방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선조대에 명동의 구(舊) 내무부청사 자리에 재건하여 한말까지 존속했다.
놀랍다. 오늘날 일제고사에 몰입한다며 예체능교육을 말살시키는 교육관료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정부에서 직영하는 악대의 종사자가 1천명이 넘었다니 조선의 예술수준은 가히 세계적으로 으뜸이라 할만하다.
조선 초 실내의 진연 등에 연주되는 음악은 맹인들로 구성된 악단에서 연주를 담당하였다. 맹인들이 연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관료들이 내의녀를 선발하여 음악을 가르쳐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시간씩 계속되는 무용반주 등에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관악기를 여성 연주자들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다시 관악기는 남성 맹인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를 통털어 여러 차례 맹인 연주자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까지 계속 존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장애인 정책이 어떠했는지, 여성 예술인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 이 사실만으로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시사점이 있다. 성별에 따른 차별보다는 남녀의 특성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 논쟁에서 승리했다. 또한 장애인에 대해서도 그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고 활용했다. 회사를 새로이 설립하고 첫 직원으로 신체에 장애를 가진 분(3급)을 모셨다. 그러나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받은 그간의 능력계발을 위한 교육이 너무 부실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능력계발을 위한 교육이 조선에 비해서도 뒤져있다. 오히려 동이를 보면서 조선의 제도에서 오늘의 정책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요사이 텔레비전 사극 '동이'를 보고 있습니다. '허준', '대장금'으로 유명한 이병훈 피디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허준'에서 우리의학을, '대장금'에서 우리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이'는 우리음악을 알리려고 만들었다기에 애정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 회부터 우리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온통 초보자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원래는 야심차게 국립국악원 연주단원들을 초대해서 촬영을 했는데 사전에 알리지도 않은 무리한 상황들을 아무런 해명도 없이 강행하기에 단원들이 태업(怠業)을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뒤로 전문가는 포기하고 국악전공 학생들을 불러 촬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출자께서 우리음악 하는 분들에 대한 사전 이해가 너무 없었나봅니다. 돈보다는 우리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존심을 먹고 사는 분들입니다.
이제 '동이'에서는 우리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종종 나오던 우리 동이의 그 아름다운 '해금'연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앙꼬? 없는 찐빵'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그나마 '동이'는 장희빈이 벌이는 궁중 권력 암투의 숨은 비리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재미로 계속 인기상승 중입니다. 궁중 감찰부의 궁녀가 되어 펼치는 동이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도 '동이'에 제대로 된 우리음악이 다시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직접 소리북을 치시며 우리 가락으로 찬송하시는 한 목사님이 보내신 메일을 제가 임의로 편집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뉴스가 교묘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통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지만 뒤늦게 저도 동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악기는 화면에 보이는데 연주는 들을 수 없고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아무래도 우리악기 소리가 아닌 중국의 얼후 소리로 들립니다.
오늘은 조선의 음악교육과 연주자를 관장하던 관청인 장악원과 맹인 연주자, 그리고 여성 연주자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젊은 단원들에게 떠밀려 예술단의 단장을 맡고 있지만 국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관심 있게 읽은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그간 만나 본 명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할 뿐입니다. 얘기는 얘기일 뿐 오해는 없으시길.....
장악원은 조선시대 음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각종 제사와 의례, 각종 행사의 음악과 음악교육, 악공(樂工)·악생(樂生)의 관리를 담당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처럼 향악과 당악은 관습도감과 전악서가 담당했다. 아악은 봉상시와 아악서가 담당했다. 이중 관습도감과 봉상시가 각각 상급기관의 역할을 하고 전악서와 아악서는 악공·가무를 담당한 재랑(齋郞)·무공들의 관청 역할을 했다. 조선의 악제는 세종대를 정점으로 대폭 정비되었다. 세조는 그 뒤를 이어 음악담당 관청의 통폐합을 단행했다. 악학과 관습도감을 합하여 악학도감으로 하고 봉상시의 제조와 판사를 도제조와 도감사(都監使)로 임명하여 모든 제악사무(祭樂事務)를 총괄하게 했다. 또 아악서와 전악서는 장악서로 통합하여 악공·악생·가무를 담당한 재랑·무공을 모두 이곳에 입속시켰다. 이로써 상·하급 기관이 각각 하나로 통합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상·하의 2기구를 다시 통합 장악서로 만들었다. 이후 성종 즉위를 전후한 시점에서 장악서를 3품아문으로 승격시키고 장악원으로 개칭했다. 실제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은 악공과 악생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악공은 천인출신들로 우방에 속했는데, 정원은 572명이었다. 악생은 양인출신으로 좌방에 속했으며 정원은 399명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의 장례원(掌禮院)으로 이속되면서 소멸했다. 장악원 건물은 처음에는 서부 여경방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선조대에 명동의 구(舊) 내무부청사 자리에 재건하여 한말까지 존속했다.
놀랍다. 오늘날 일제고사에 몰입한다며 예체능교육을 말살시키는 교육관료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정부에서 직영하는 악대의 종사자가 1천명이 넘었다니 조선의 예술수준은 가히 세계적으로 으뜸이라 할만하다.
조선 초 실내의 진연 등에 연주되는 음악은 맹인들로 구성된 악단에서 연주를 담당하였다. 맹인들이 연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관료들이 내의녀를 선발하여 음악을 가르쳐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시간씩 계속되는 무용반주 등에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관악기를 여성 연주자들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다시 관악기는 남성 맹인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를 통털어 여러 차례 맹인 연주자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까지 계속 존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장애인 정책이 어떠했는지, 여성 예술인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 이 사실만으로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시사점이 있다. 성별에 따른 차별보다는 남녀의 특성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 논쟁에서 승리했다. 또한 장애인에 대해서도 그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고 활용했다. 회사를 새로이 설립하고 첫 직원으로 신체에 장애를 가진 분(3급)을 모셨다. 그러나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받은 그간의 능력계발을 위한 교육이 너무 부실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능력계발을 위한 교육이 조선에 비해서도 뒤져있다. 오히려 동이를 보면서 조선의 제도에서 오늘의 정책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