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 유감

하늘소리
2010-03-16
조회수 9248
그리워 유감

“햇살 좋고 바람 삽상한 날 부칠 곳 없는 마음 어느 가까운 언덕이나 들녘 찾아보소서. 그리운 옛님, 내 가슴속에 있는 그대가 어찌 연인뿐이겠습니까. 바람에 날리는 들국화와 갈꽃과 언덕길, 그리고 추억.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모든 것 다 옛님 아니겠습니까. 모두 다 흘러갔다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고, 부칠 곳 없는 마음 탓하지 말고 부는 바람 따라 한나절 그 좋은 추억과 어우러져도 좋을 계절 와 있네요.”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그리워’란 시를 소개한 글이다. ‘그리워’는 고교시절 음악교과서에도 아름다운 가곡으로 실려 있다. 두산백과사전의 소개를 보자.

1936년에 작곡된 것으로 처음에는 정지용의 시 《고향》에 붙였던 것인데, 사정에 따라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로 시작되는 이은상의 《그리워》란 시로 바꾸었다. 본래의 가사인 정지용의 시 《고향》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로 시작된다. 이 가곡은 작곡자의 누이인 채선엽에 의하여 일본 도쿄[東京]에서 처음으로 불렸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얼마 전 정지용 전집을 읽어가다 참으로 의아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은상의 ‘그리워’와 정지용의 ‘그리워’는 너무 흡사하다. 아래에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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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의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부칠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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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어디러뇨
동녘에 피어있는 들국화 웃어주는데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노라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옛 추억
가슴 아픈 그 추억 더듬지 말자
내 가슴엔 그리움이 있고
나의 웃음도 년륜에 사겨졌나니
내 그것만 가지고 가노라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고향은 없어
진종일 진종일 언덕길 헤매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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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논문의 표절이나 작곡이나 노랫말의 표절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 놀라울 것은 없지만 이 시나 노래는 너무 궁금한 것이 많다. 정지용시인은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던 분이다. 그는 우리가 종래 알았던 것과 같이 자진 월북한 분도 아니고 강제로 납북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불경스럽게도 몇 가지 억측이 머리를 헤집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스승이나 동료의 아름다운 글을 사장시킬 수 없어 약간 손질해서 다른 이가 발표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했을까?

아니면 절친한 사람에게 준 것을 받은 사람이 노랫말에 맞도록 고쳐서 발표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생사를 알 수 없고 돌아 올 가망도 없으니 자신의 것인 양 발표했을까? 그래서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는 것을 그토록 반대했을까? 일전 국악계의 거성으로 알려진 인물이 사실은 스승의 육필원고를 손질해서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해서 성공했다는 후손들의 증언을 직접 들은 일이 있다. 그 스승의 자녀는 대학 강단에도 제대로 설 수 없었다고 한다. 바로 거물이 된 그 제자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워’란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노래는 부디 사연도 아름답게 남아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정지용의 시가 바뀌게 된 사연도 속 시원히 누가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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