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고 덜 나쁘게 실패하라

이은규
2015-07-20
조회수 131

[이은규의 눈]누가 헌법을 말하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집권당 원내대표에 사퇴의 변이다. 이 한마디로 한때 동지였던(그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한다) 박근혜 씨에게 큰! 엿을 먹였다. 언론에 호들갑은 휘황찬란했다. 유승민, 그는 난세의 걸출한 영웅이 되어버렸다. 조중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겨레, 경향...마저도. 출생부터 가정환경, 정계입문까지 그에 관한 기사는 차고 넘쳐났으며 한편의 위인열전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성완종 리스트와 메르스에 강한 전염성도 날려버린 드라마.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비리를 단숨에 삼켜버린 뉴스라니... 시시각각 요동치는 지지율 중계까지. 무능한 국가 때문에, 염치없는 대통령과 집권당 때문에 물에 빠져 죽고, 병에 걸려 죽고, 가난해서 죽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 몹시 불편하고 못마땅하던 차에 한상희 교수의 칼럼‘누가 헌법을 말하는가.’를 발견했다.

헌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운운하며 헌법의 지고한 가치를 말하기 전에 지난 날 공화국 헌법 앞에 새털처럼 가벼웠던 자신에 대한 성찰이 앞섰더라면 어떠했을까?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가볍고 짧은 세치 혀. 나는 순정하게도 유승민, 그의 회개를 진심으로 기대했었나보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에 자유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세월호 진상조사, 메르스 확산에 대한 책임 등 헌법에 부여된 국민의 기본권 유린과 국가에 책임 앞에서는 침묵한 채 피해자 코스프레 라니. 다른 듯 닮은 박근혜와 유승민에게 생존에 대한 자기변명은 있어도 주권자에 대한 연민은 찾아 볼 수 없다. 연민 속에서만이 우애와 연대가 싹튼다.

“거듭 말하거니와 유승민은 헌법 실패와 정치 실패의 대표단수이다. 그로 인해 빙산의 일각은 드러났을지언정, 저항과 극복의 단초가 열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그가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지금의 피해자 역할이 아니라 “다시, 그리고 덜 나쁘게 실패하라(fail again. fail better)”라는 베케트의 경구일 터이다.”(누가 헌법을 말하는가. 중에서) 한상희 교수의 유승민에 대한 충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주권자들이여 다시, 그리고 덜 나쁘게 실패하라.”

기억하자. 지금에 헌법은 박종철 열사에 죽음과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온 생을 걸어 헌신했던 수많은 민주 운동가와 군사독재 희생자들 위에 만들어졌다. 1961년 3.15 의거와 4.19 혁명,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을 국가기념일로 기억하고 추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누가 헌법을 말하는가

(기사바로가기http://m.media.daum.net/m/media/newsview/20150712211027012)

누가 헌법을 말하는가. 누가 민주공화국을 외치나. 그것은 “배신의 정치”를 가리기에는 너무도 무겁다. 국회의원 한 사람의 정치생명 정도로 치환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생명을 걸고 헌법 제1조 제1항을 지키고 싶었다’고 토로하였다.

▲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하지만 정작 그는 정치생명을 건 적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명령을 지킨 적도 없다. 그저 대통령의 냉혹한 추달을 그냥 몸으로 버텨내었고 그것도 겨우 2주 만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기에 오직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라는 정치 경로 하나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이 와중에 그가 표방한 헌법은 그의 뒤에 숨어 있는 정부·여당의 정치꾼들로부터 비참하게 배신당한 채 내팽개쳐져 있다.

물론 ‘민주공화국’의 반대편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일인통치의 폐해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헌법 수호를 내걸며 내부고발자 역을 자청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무력하다. 대통령의 전횡에 저항하는 국민적인 저항 지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로지 피해자로서만 자신을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소불위의 대통령과 함께 지금의 헌정 실패를 야기한 159명의 새누리당 의원들이 자행하는 반헌법의 정치는 바로 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의해 은폐되고 있을 따름이다.

애초 이 사단은 세월호 참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온 세상의 엄청난 아픔이 된 이 사건은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정부의 기피 대상으로 전락해왔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은 그 대표격이다. 진상조사를 해야 할 위원회를 조사 대상인 정부가 맘대로 통제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 이에 야당은 대통령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요구권을 규정한 국회법 개정안을 내밀었고 공무원연금법에 주력한 원내대표 유승민 의원은 이 카드를 받아들였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헌법 이반은 여기서 노골화된다. 국회법 개정안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마지노선이자 동시에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를 제대로 바로잡는 가장 중대한 헌법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국회법 개정안으로 야기된 권력의 위기를 배신자 국면으로 전환하였고 “민주공화국”을 지키고 싶었다던 유승민은 이런 대통령의 의도에 무기력하게 굴복해 버렸다. 여기에 새누리당은 이를 유승민이라는 한 명의 국회의원과 불통과 독선의 상징이 되어버린 대통령의 싸움으로 고착시켰다. 대통령의 연이은 국정 실패에 실망한 절대 과반수 국민들을 이 싸움의 구경꾼으로 몰아낸 것이다.

결국 작금의 정치판에는 헌법도 민주공화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유승민이라는 한 사람만이 기억될 뿐이다. 대통령의 의중만을 헤아리며 거수기가 되기를 자처한 나머지 159명의 새누리당 의원들은 슬그머니 막후로 사라져버렸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굳은 공약도 무위로 돌려버리고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서부터 세월호 진상조사에 이르는 수많은 의혹들도 덮어버리며, 현행 헌법의 역사적 토대를 거스른 박상옥을 대법관으로 추대했던, 세월호나 메르스의 참사는 물론 사자방의 부정부패나 경제위기 등의 현안에는 한없이 무력하며 무책임했던 그 새누리당의 책임은, “대통령에 맞선” 유승민에 대한 대통령의 과잉행동의 에피소드로 희석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배신당한다. 국헌을 수호하겠다던 대통령에 의해, 역시 헌법 수호를 맹세했던 159명의 의원들에 의해, 나아가 이 배신의 정치에서 가장 성실한 조연의 역을 담당했던 유승민에 의해서 말이다.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생명으로 지켜내었던 “민주공화국”은 원내대표라는 하찮은 정치경력에 비견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주권재민의 헌법 이념은 대통령의 말을 곧장 의원총회의 ‘총의’로 바꾸어내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맹목성에 의해 유린된다. 그리고 입헌주의의 절대가치인 권력분립은 국회법 개정안의 재의 절차까지도 포기해버린 그들에 의해 다시금 부정된다. 국민주권이라는 헌법명령이 이제 대통령 ‘중심’제라는 구래의 억압기제에 의해 압살되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유승민은 헌법 실패와 정치 실패의 대표단수이다. 그로 인해 빙산의 일각은 드러났을지언정, 저항과 극복의 단초가 열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그가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지금의 피해자 역할이 아니라 “다시, 그리고 덜 나쁘게 실패하라(fail again. fail better)”라는 베케트의 경구일 터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0